my daily life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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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ping At Last,
Yearbook

Homesick | Sleeping At Last

Cry a storm of tears
If it helps you breathe

(via jie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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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Entremont,
Ravel: Complete Piano Works [Disc 2]

la-nero-maestro:

A Minuet For Solo Piano Written By Maurice Ravel In 1909 To Mark The Centenary Of Joseph Haydn’s Death.

"Menuet Sur Le Nom D’Haydn" ( Minuet on the name of Haydn ) By Composer Joseph Maurice Ravel, Performed By Pianist Philippe Entremont

(via brightsizelifekr)

다이앤에게 이번 타일랜드 가는 비행기값을 지금 당장 못줘서 미안하다고 메세지를 보냈다. 떠나는 날 한국돈으로 주겠다고. 4월 30일날 가서 5월 8일날 오는 일정. 글쎄. 내가 왜 가야하는지 아직까지도 마음에 분명한 답이 없다.시간이 갈수록 clear해져야 하는게 아닐까…그러겠지…바랬는데 여전히 나에겐 이유만한 이유가 없다. 여전히 효율성을 따지는 나다. 여전히 손익을 따져가며 결정을 한다. 물론이겠지만. 주님의 일을 하면서 탁월함, 영향력, 효율성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다를 줄 알았던,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있는) 선교 단체. 그래 조직이구나.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능력을 보고 손익을 따져가며 사람을 고용하는 조직.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연하다. 은사에 맞춰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 하는 건 달리 말하면 능력별로 이쪽 저쪽에 알맞게 고용하고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한다는것. 말만 다르지 뭐가 다른가. 물론 선교단체 특성상 office worker 들만 좀 페이를 받을까? 그래도 대부분 자비량 선교사들, 그들은 후원자들과 후원교회로부터 기도와 물질을 후원받는다.

내가 실망했던 이유는 내가 그렇게 평가받는다는 것이 싫었던거지. volunteer로.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함께 동역하고 협력하고 싶었다.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지만. 어떤 성과를 내야지만 함께 일하겠다라는 식의 발언은 내 감정을 확 긁어놓았다. 그저 쉽게 어쩌면 흘려버리는 말이었을지 모르겠다. 근데 그 말이 나에겐 사람보다 능력을 따지는, 탁월함과 효율성을 더 위에 올려놓는 진절머리 나는 사회구조가 오버랩되어 갑자기 정이 뚜욱 떨어지더라.

어찌보면 당연한 절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났다라는 것이 더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하지만 가만히 나를 살펴보니, 나도 그렇더라. 어떤 일을 결정할때 나에게 손해가 있으면, 나에게 불편함이 편안함보다 더 크면, 효율적이지 않으면 거칠게 no 하더라. 굉장히 왔다갔다 하더라. 결정을 못 내리고 있더라…내가.

타일랜드를 가서 봐라 하는 그들의 말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그래서. 그 다음에 뭐. 같이 일할 생각이 있는건가, 나하고? 그렇다면 왜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진행되어 지는 일들이 여전히 불투명하고. 여전히 위태롭다. 그래서일까? 홀로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봐도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 근데 한가지 분명한것은.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 고거 외에는 읎따. 주님이 기뻐하신다니 결정을 했다. 어찌됐던 미래에 나에게 유익이겠거니. 어디를 가든 아직 나라를 안정한 예비선교사 후보생이니 이쪽 저쪽 보라고 하시나부다, 까짓것 태국 안가봤으니 이번에 함 가보지뭐. 이제 그만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한나라 정해서 올인해라 하시는 엄마 말씀에 아직 싱글이라 안된다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놓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손익을 따지고 효율성을 따지는 건 감정상하고 내가 따지는 것은 필요한 믿음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내가 참…한심스러웠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더니, 딱 그 꼬락서니. 그저 주님 기뻐하시니 발걸음을 옮긴다, 이렇게 믿고 행하고 싶지만 여전히 마음의 파도는 가라앉지 않더라니.

오늘 그렇게 다이앤에게 메세지를 보내놓고. 학원에서 받은 월급과 카드값 (망할, 뭘 그렇게 쓴거냐)을 계산해보고, 비행기값 주면 또 거지네. 예전 다이앤이 한번이라도 저 위에 계신 분께 그저 ‘나를 축복해주세요’ 라고 기도해본적 있냐 묻더라. 뭐 여러번 물었지만, 물을 때마다 손발이 오글거렸다. 죄송했다. 물질의 청지기 역할을 제대로 못한 내가 무슨 면목으로 또 달라하냐며. 그렇게 말해놓고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딸이 아니라 일꾼인가. 아니면 철이 들어도 너무 철이 든 애어른인가. 좋은건지, 나쁜건지…

메세지를 보내놓고, 잠시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 그냥…확…축복해주세…’ 하다가 입을 닫았다. 면목없어서. 카드값을 보니 더 면목없다.

그리고 바로 다이앤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비행기값을 단체에서 후원해줬으니 걱정말라며…

바로 앞에 주님이 계셨다. 어깨를 두드리시며, ‘괜찮아. 부끄러울거 없어, 너는 일꾼이 아니라 내 딸이야,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갚을 필요 없어.’

'Don't feel burdened at all. This is a blessing so just receive it'

모든 걱정을 단 한순간에 덮어버리시는구나. 이제 됐냐? 그만 걱정하고 이제 그만…머리 굴려 이리 저리 재지말아라…하시는구나. 이렇게 또 한번 부끄러운 밤이 지나간다. 왜 이렇게 못났을까. 지지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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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gio Gaslini,
Piano Solo

grooviejazz:

'Sicilienne' by Giorgio Gaslini [Piano Solo,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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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The Beatles

wizardofthewilds:

The Beatles- Black Bird.

(via brightsizelif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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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Rava,
What A Day

grooviejazz:

'E Penso A Te' by Enrico Rava [What A Day, 2002]

이제 그만 보험료를 다 가져가라는 엄마말씀대로. 쿨하게. 그러니까 내 통장으로 자동이체하라고 했잖아. 찾아오신 보험아줌마가 의료실비가 괜찮다며 내놓은 보험 또 하나. 이전것이 이제 곧 끝나니까 그리고 너무 옛날에 들어놓은거라 별로 혜택도 없지 않냐며. 갑자기 엄마가 이전것은 당신이 내줄테니 새로운 것만 나보고 내라며. 고로 엄마가 내던 보험료는 그대로. 나는 하나더. 뭥미. 이럴려고 한게 아니잖아. 

보험. 필요하기도 한것같고. 쓸데없는것같기도 하고. 

오면서 다시한번 되뇌였다. 바보같은 네 이름을. 이렇게 문득 문득 생각이 나는 너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오늘 학원에서 만나는 아이들, 학교과제는 별로 없는듯, 죄다 학원 과제들이다. 학원 과제에 치여 12시가 넘도록 자지도 못하고 나보다는 더 퀭…해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래, 너희들도 힘들겠지. 언어는 궁뎅이 붙이고 앉아있는다도 되는게 아닌것을, 내 너희들보다 더 잘 아는데…말에 원칙이 필요하다지만 (물론) 수학도 아니고 문제풀이한다고 입이 뚫릴리없다. 앎에도 불구하고 무섭게 혼을 낸거. 미안하다. 

부르르르르. 오는 카톡을 힐끗힐끗 보면서도 오늘은 왠지 아무런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시시껄렁한 농담따위 하지 않으리라. 모두 다 내려놓는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아닐터. 사람이 하는 일의 한계가 늘 그러하듯.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수없이 효율성을 따져 사람을 고르고, 그 사람의 능력을 봐가면서 일을 맡기겠다 하는 건, 어떤 곳이나 그렇지 않은가. 내가 또 동화같은 천진난만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나부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젊음의 때에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분명 있다. 알려주고 싶다. 더 넓은 세상을 보라고 하고 싶다. 반응하는 청년들이 참으로 귀해서 도와주고 싶었다.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소망하는 것도 없다. 사실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많아지는 점점 늘어나는 살림이 왠지 갑갑하게, 그리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은. 과연 그 누가 말하는 또 도져버린 ‘역마살’인가. 그게 뭔 뜻인지도 모르지만 불교냄새가 확 난다. 바로 찾아봤더니 동양점술용어란다. 이곳 저곳 여기 저기 떠도는 팔자…훗. 팔자라는 말 대신 부르심에 순종하는 운명 :) 이라고 해두자. 좋네. 

여하튼 괜한 실망스러움에 조금은 마음이 무거운 몇일 이었다. 우리 모두가 힘쓰고 애쓰고 있는데. 여전히 살가운 사람들의 진실한 공동체가 그리운 하루하루이다. 어리광 부릴 곳이 없어서 그런가. 그저 찾아가 눈물 뚝뚝 흘리며 밥 얻어먹을 언니네 집이 없어서 그런가. 그저 하늘에 우수수 별 바라보며 늘 한시간씩 통화했던 내 친구의 목소리가 그리운건…나뿐인가. 

예전 홈스테이하던 방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있다가…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냥 다짜고짜 계속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친구의 그 침묵조차 그리운 밤이다. 

우간다에 있을때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노래…

"내 노래를 들으시는 이여…어서 오세요. 지금 내게로 나 당신을 기다려요."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주님께만 드리는 나의 속삭임이라 생각했다. 우간다 그 습기 가득한 그 방에서, 버석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보면 천장에 붙어있는 하얀 도마뱀을 귀엽게 바라보며, 슬리퍼를 던져 기절시킨 다음 밖으로 보내버리던 그 기억. 수업 준비를 하며 참으로 느리던 인터넷을 원망. 네이버 영어사전의 도움을 받아 한문장 한문장 써내려갔던 문장들. 파워포인트를 만들며, 내일은 제발 수업시간에 전기가 나가지 않기를 바랬던 그 초조함. 모든 것들이 지금 내 마음속에 다시한번 폭풍처럼 밀려오는구나.

오랜만입니다. 영혼의 속삭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권력을 통해 영향력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권력을 통해 얻은 영향력으로는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너희는 전혀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퍼부으라. 그러면 곧 그들이 너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너희가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너희를 신뢰할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너희를 우러러보면 너희에게 진정한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진정한 영향력은 남들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다." 

p.223 팀 켈러, 왕의 십자가 

"세상에는 상처받은 사람이 무수히 많다. 마음이 괴로워 사랑을 절실히 갈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시계를 보게 된다. 틈을 봐서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다. 신세 한탄을 듣다 보면 그야말로 진이 빠진다. 하지만 나의 감정적 샘이 고갈될 때까지 진정한 사랑으로 귀를 기울여 줘야 그들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다. 나의 기쁨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나만 마음 편하게 살려고 그런 사람들을 피하면 그들은 점점 죽어 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을 대신하여 희생하는 것이다. 

더 극적인 예로 양육에 관해 생각해 보자. 자녀는 부모에게 의존한다. 자녀는 스스로를 챙길 수 없다. 자녀는 저절로 의존적인 존재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자라지 않는다. 부모가 20년 넘게 자신을 포기해야만 번듯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재미 없어도 꿋꿋이 동화책을 읽어 주지 않으면 자녀의 지성을 제대로 자라나지 않는다. 또한 부모는 자녀의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경청해야 한다. 자녀에게 옷을 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나이다. 게다가 한 번 혼낼 때마다 다섯 번을 칭찬해 줘야 한다. 부모가 자유와 시간을 많이 포기하지 않으면 자녀는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않는 부모가 너무 많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녀에게 자신을 내줄 마음이 없다. 희생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자녀는 몸은 커져도 마음은 약하고 의존적인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가 희생하거나 자녀가 희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부모가 잠시의 고통을 참든가 자녀가 평생 고통 속에서 삶을 낭비하든가 둘 중 하나다. 진정한 사랑은 대신 희생하는 사랑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보다도 사랑이 충만하시다. 그토록 사랑이 많은 분이기에 궁극의 악과 죄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의 희생을 하신 것이다. 죄는 모른 체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용서할게” 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거나 회복되지 않는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나님이 악을 그냥 눈감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누군가는 빚을 갚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죽으심으로 그 빚을 대신 갚아 주셨다.

C.S. Lewis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대속의 개념을 이렇게 풀이했다. “반역과 상관없는 자발적인 희생자가 반역자 대신 죽었다. 그 순간, 탁자가 갈라지고 죽음 자체가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p. 218-219 팀 켈러, 왕의 십자가

"이런 경험을 해 봤는가? 누군가의 연민과 사랑 덕분에 고난을 이길 힘을 얻었던 적이 있는가?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인정과 격려로 두려움이 결단으로 변했던 적이 있는가?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서 근심이 녹아내리고 소망이 솟았던 적은 없는가? 

이런 도움을 자주 받으면 우리가 달라지지 않을까? 고난 속에서도 원망이나 미움이나 암울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더 지혜롭고 심오하고 강해지지 않을까? 고난이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오히려 연민을 키워 주지 않을까? 실패가 오히려 성공보다 더 큰 유익을 낳지 않을까? 바로 그렇다. 하지만 친구과 가족이 때마다 우리를 그렇게 인정하고 격려하고 사랑해 주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바로 ‘예배’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을 우리는 마음으로 똑똑히 봐야 한다.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해 주실 포옹을 미리 맛보아야 한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도 느껴야 한다. 

말만 들어서는 누군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실감할 수 없다. 말을 듣고 믿을 수는 있지만 실물을 가까이서 봐야 실제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왜 그럴까? 새로운 정보를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머리로 아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식당의 맛은 전국에서 최고야.” 이 말을 믿는다 해도 실제로 그곳에 가서 먹어 봐야 탄성이 터져 나온다.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엇이든 실제로 맛보아야 거기서 영양분을 얻고 강해질 수 있다. 

변화산 사건은 단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시키기 위한 기적만은 아니었다. 미래의 시험에 이겨 낼 힘을 얻기 위한 공동의 예배였다.”

p 183-184 팀 켈러, 왕의 십자가 

"이제 수세기가 지나 또 다른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난다. 눈부신 광채 때문에 예수님의 옷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 산꼭대기,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 심지어 모세의 출현까지 비슷하다. 시내 산의 사건이 재연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모세는 달이 태양빛을 반사하듯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을 스스로 만들어 내셨다. 엘리야나 모세 같은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의 영광 자체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표현을 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1:3)."

"마가에 따르면 베드로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랍비여…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한번 살펴보자. 여기서 "초막"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성막’에 해당하는 헬라어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 산에 임한 뒤에 히브리 백성들은 성막을 지었다. 왜 그랬을까? 대부분의 종교는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격차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신전(혹은 성막)을 세운다. 보통 인간은 신의 임재를 견뎌 낼 수 없기 때문에 이 신전 안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바치고 의식을 행한다. 따라서 베드로의 말을 해석하자면 이렇다.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보호해 줄 성막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즉시 구름이 나타나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뒤덮었다. 그리고 쉐키나 영광의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셨기 때문이다. 엘리야와 모세, 아니 그 어떤 인간도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이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춤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성전과 성막을 필요 없게 만든 궁극의 성전이요 성막이시다. 예수님은 더 이상 희생 제물을 필요 없게 만든 궁극의 희생 제물이요 모든 제사장에게 나아갈 방향을 보여 준 궁극의 제사장이시다. 

구름이 내려왔을 때 제자들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였다. 마가복음의 초반부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처럼 제자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에게 쏟아 내시는 사랑의 표현을 두 귀로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구름이 사라지고 제자들은 눈부신 광채가 사라진 산꼭대기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바로 ‘예배’를 경험한 것이다.” 

p 178-179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자신을 포기하면 진정한 자신을 얻으리라.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구원하리라. 죽음, 즉 매일 자기 야망과 소원의 죽음, 결국에는 몸 전체의 죽음에 온전히 순응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무엇도 움켜쥐지 말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부활할 수 없다. 자신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미움과 외로움, 절망, 분노, 파멸, 부패만 얻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면 그분을 찾을 뿐 아니라 나머지도 덤으로 따라온다.

Tim Keller, King’s Cross (p.169) 팀켈러, 왕의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