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God’s holy priest.

Past Tuesday, my cousin became an ordained pastor as you may know. I attended the ordination service. Since I am crazy about the tabernacle and all its furnishings, and the priests and all their duties and obligations, I could see some significant symbols during that service. First of all, as the pastors from the presbytery pronounced the priesthood of the candidates, the pastors clothed them with a garment. Second of all, the pastors laid their hands on each head of the candidate and prayed to God, offering them up to God. And the passage we studied from Exodus and Leviticus came up to my mind.

Moses clothed Aaron with priestly garments on the day of ordination (Lev.8:6-9). And Moses took sacrificial animals as sin offering and burnt offering for Aaron and his sons’ purification. He laid his hand on the head of the animals and then they burnt them on the altar according to its rules.

When the pastors laid their hands on the heads of the candidates I could kind of picture each one of them as a sacrificial animal, as a burnt offering, which was supposed to be burned completely on the altar. And I prayed that God may accept their lives as a burnt offering, as a pleasing aroma. And also I could picture them as a sin offering; sacrifice and death throughout their lives. Since they were called by God to be pastors, to be ministers they have been placed in between God and people as the representatives. They represent Holy God to unholy people; also they represent unholy people to Holy God.

Offering themselves to God continually they also need to rely on Jesus Christ, who covers our unholiness with His blood, which is effective eternally. In the same way Jesus did, they also need to bear the sins of people they are going to serve as the representatives; they need to sacrifice themselves for the people they’re going to serve; it requires a lot of energy, effort, money, time, tear; also they need to die to themselves but live for Christ and for the people they’re going to serve. Not easy journey. Not easy step. I could see a holy, worthy yet pretty heavy weight on their shoulders.

Do you think it’s not your story, but just a story for a candidate for a pastor? Oh, well. 1 Peter 2:9-10 points out that we are all called by God as a chosen rac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for his own possession. This is our true identity. Our job, our tool in our hands can be various. We can stand between the Holy God and unholy people as a teacher, as a businessman, as a musician, as a nurse, as a pharmacist, as whoever you will be. That’s what you do, but the most important thing you need to keep in mind is your true identity, “Who you are.” You are a priest, a middle man.

image

image

"lay his hand on the head"

이 해석은 지금까지 다루지 않은 의식의 한 가지 특징으로 확증된다. 곧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4절). 여기서 안수하다는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 (사마크)를 매우 약하게 번역한 것이다. “누르다” 가 더 나은 번역일 것이다 (참고, 사 59:16, 겔 24:2, 30:6, 암 5:19). 이 때 예배자는 단순히 짐승에 접촉한 것이 아니다. 짐승에 기대야 했다. 이 행동은 많은 제사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참고, 3:2, 8, 13, 4:4, 15, 24, 16:21). 여기서 안수의 중요성이 문맥을 통해 특별히 강조된다. 제물을 속죄 제물로 합당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안수 행위다 (3,4절). 

이 안수 행위를 강조하는 한 가지 이유는 안수하면서 예배자가 기도했기 때문이다. 레위기 16장 21절 (참고, 신21:6-9)과 후기 유대 전승에서 안수는 기도와 연계되어 있다. 이것은 중요한 신학적 원리다. 기도 없는 제사는 무익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온 힘을 쏟아야 하고, 마음과 입, 손과 발이 예배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단순한 의식 참여나 교회 출석만으로는 부적합하다. 진심어린 기도와 찬양이 동반되어야 한다. 

안수 행위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안수가 예배자와 제물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이 행위를 통해 정확히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지는 불확실하다. 어떤 이들은 안수를 소유권의 선언으로 본다. “이것은 제물로 바쳐질 내 짐승이다.” 이 말에는 제물의 유익이 예배자에게 이전된다는 함축적 의미가 들어 있다. 이것은 무척 자명하기 때문에 특정 안수 행위에서 이 취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거의 없어 보인다. 다른 두 해석이 더 추천할만하다. 하나의 해석은 안수가 짐승이 예배자를 대신한다는 개념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이때 예배자는 희생되는 제물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여기에 명확히 함축된 의미는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희생 제물은 기증자 자신의 대리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한 해석은 안수가 예배자의 죄를 상징적으로 짐승에게 이전시킨다는 것이다. 이 두 해서의 의미는 성경에서 증명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에게 안수함으로써 레위인이 자신들의 장자 대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정했다 (민 8:10. 참고, 민 3:40-51). 마찬가지로 모세도 여호수아에게 안수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호수아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자기 대신 행하돌고 권세를 위임했다 (민 27:18, 23; 신 34:9). 그러나 속죄일에 아론은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광야로 보내야” 했다 (레 16:21). 또한 24장 14절에서도, 저주한 사람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저주한 사람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의 죄 (저주를 들은 죄)를 이전시킴으로써 저주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와 저주를 들은 사람들의 죄에 대해 처벌 받도록 해야 했다. 

이 두 설명 가운데 반드시 어느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둘 다 속죄하는 제물, 즉 사람의 생명을 위한 속전 역할을 하는 짐승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짐승이 예배자의 대리인이 되어 예배자 대신 죽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또는 안수로 말미암아 죄가 이전되기 때문에 이 짐승이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The Book of Leviticus by Gordon J. Wenham

레위기, 고든 웬함 p.71-72

image공부하면서 만든 파워포인트 

lubdub-jj:

니 생각에 꽤 즐겁고
니 생각에 퍽 외로워
이상한 일이야 누굴 좋아한단 건

아무 일도 없는 저녁
집 앞을 걷다 밤 공기가 좋아서
뜬금없이 이렇게 니가 보고 싶어

참 묘한 일이야 사랑은
좋아서 그립고 그리워서 외로워져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내 맘이 내 맘이 아닌걸
이제와 어떡해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내 주위엔 온통 너뿐인 것 같아 묘해

보고 싶어 신기하고
신기해서 보고 싶고
그러다 한 순간 미친 듯 불안하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햇살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고
그러다가 니 전화 한 통에 다 낫고
참 묘한 일이야 사랑은
아파서 고맙고 고마워서 대견해져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이 길이 그 길이 아닌걸
모르고 떠나온 여행처럼 낯설지만
그래서 한번 더 가보고 싶어져 너와

이렇게 너를 바라볼 때
뭐랄까 나는 행복한 채로 두려워져

참 묘한 일이야 사랑은
좋아서 그립고 그리워서 외로워져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내 맘이 내 맘이 아닌걸
이제와 어떡해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내 주위엔 온통 너뿐인 것 같아 묘해

그래서 한번 더 가보고 싶어져 너와

Ecclesiastes 9:11-12

"Again I saw that under the sun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t the battle to the strong, nor bread to the wise, nor riches to the intelligent, nor favor to those who knowledge, but time and chance happen to them all. For man does not know his time. Like fish that are taken in an evil net, and like birds that are caught in a snare, so the children of man are snared at an evil time, when it suddenly falls upon them." 

갑자기 어제 화장실 문에 (*분명 추워진 날씨때문이었으리라) 사뿐히 나려앉은 모기를 손바닥으로 확! 쮝여뿌렸다. 그러면서 순간, 그래, 이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려운지도 모른채 확 죽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지? 고통없이 그냥 이 짧은 순간에 그냥 확! 그지? 이 모기는 자기가 10분 후에, 5분 후에, 10초 후에, 0.001 초후에 내 손바닥의 무게로 몸이 짓눌려 죽는다는것을 전혀 몰랐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는 커녕, 어쩌면 후에 일어날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물론 아니었겠지만). 전도서 말씀에 우리 인생 역시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sudden death 갑작스런 죽음의 통보 (이건 감사한 일이네, 어느정도 죽음에 대한 준비시간이 마련되어 있으니) 앞에 무력해지는 것이 인생인게지.

모두에게 시간과 기회는 동일하게 찾아온다. 그것의 모양과 크기와 타이밍이 다를뿐. 공평하신 하나님, 왠지 이 말에는 사촌이 땅을 사고 배아픈 내 마음을 위로하려는 지극히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고백같다…내가 그렇게 이 말을 써버릇해서 그런거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의롭게 보응하신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도록.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다. 콩심었는데 팥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를 구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이심엔 분명하고 이것이 은혜인거지. 다시 땅을 개간하고 올바른 것, 씨앗을 뿌리고 경작하게 하시는, 그 기회를 다시 주시는 주님은 은혜의 주님이시다. 분별하고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이라는 이 시간. 아니, 5분 뒤, 10분 뒤, 한치앞도 예견못하는 나의 자만은 어디까지일까. 결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임을 알고 오늘 하루를 그분께 드리는 것. 오늘 내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것. 갑자기 찾아온 죽음앞에도 의연할 수 있는것…이것도 훈련일테다.